| 신분한계 극복한 신라 첫 유학자 '강수 |
강수는 통일신라의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유학에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다.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유학과 문장력으로 출세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신라 중대 유교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외교 분야에서 큰 활약 불교국가였던 신라에서 강수는 유교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히고 실천한 인물이다. 불교는 속세 바깥에 관한 가르침이며 유교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한 가르침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로 부각되면서 신라의 관료로 활동할 수 있었는데 유교적 교양과 학식에 바탕을 둔 문장을 통해서였다. 태영무열왕이 즉위한 후 강수는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어려운 내용의 외교문서를 왕 앞에서 막히는 곳 없이 정확하게 풀이했고, 무열왕의 의도와 신라의 입장을 훌륭하게 드러낸 문장을 회신하여 그 학식을 인정받았다. 또 신라의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당나라가 억류하고 있던 무열왕의 아들 김인문을 보내줄 것을 청하는 글 ‘청방인문표’를 지어 보내니 당 고종이 크게 감동했고, 설인귀에게 보내는 문무왕의 글도 강수가 지었다. 그 뒤 무열왕이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할 때 외교문서를 작성하여 고구려ㆍ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무열왕은 그에게 ‘강수’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그의 머리뼈 생김새가 특이하여 직접 지어 준 이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강수가 태어났을 때 보통 사람과 달리 뒷머리의 뼈가 높이 솟아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를 찾아가 물어보니 장래에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강수의 신분적 한계 강수가 신라 외교 분야에서 펼친 활약과 세운 공을 감안하면 그가 받은 지위는 낮았다. 이는 그의 골품이 육두품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한계, 즉 신분적 한계 탓이다. 그는 경제적 부와 생계에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인물이기도 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적으로 미천한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결혼할 정도로 진취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가족 또한 재물을 탐내지 않아 그가 죽은 뒤 왕이 장례식에 보낸 많은 물품을 모두 기증하였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고 신라 중대 유교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강수는 유학자라 부를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인물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