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然諾重應(연낙중응)하라. 승낙할 때엔 신중히 응하라. 【然】篎- 총 12획 그럴 연 火(불 화): 불이 세차게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글자입니다. 【諾】言- 16 획 승낙할 낙 言(말씀 언): 혀를 입 밖으로 길게 뽑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입니다. 【重】里- 총 9획 무거울 중 里(마을 리): 밭을 의미하는 '田'과 흙을 의미하는 '土'가 결합되어 농사를 짓는 마을을 의미합니다. 【應】心- 17획 응할 응 心(마음 심): 옛날에는 머리가 수행하는 기능을 심장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해, 마음의 바탕인 심장을 본뜬 글자입니다.
*조선조(朝鮮朝) 왕릉(王陵) 이야기.
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 영릉(英陵)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 사 적 : 제 195 호
英陵의 특징: 세종(이도: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영내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되었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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