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뿌리》를 읽으며 동두천에게 미안했다. 우리 역사의 음지이며 특별한 흔적이며 아픈 현실이었던 동두천. 그 동두천 사람들과 양색시와 혼혈아들에게 미안했다. 막연한 연민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과 이해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무리 더러운 역사와 진창이라도 우리의 뿌리가 되어 있는 것들을 왜 고마워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인종과 신분과 태어난 곳과 성과 직업의 차별을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이것을 알게 해준 것만으로도 이 책과 함께 떠난 여행은 아깝지 않았다. ― 도종환(시인)
참 오랫만에 소설을 펴 들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동두천이 마치 오래 전부터 내 기억 속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며 단숨에 다 읽어 버렸다.
무심코 식탁에 앉아 펼쳐든 책 속에서, 아주 오래 된 영사기를 돌려 보는 것처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분노와 원망 그리고 슬픔이 제대로 된 소리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쉴 새없이 돌아가고 있다.
가뜩이나 전작권 환수니, 북핵 실험이니 세상이 어수선한 이 때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뿌리를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때는 그저 미국이란 나라가 좋은 나라인 줄만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엔 엄마가 사다 주시는 미제 초컬릿과 과자, 코코아, 땅콩잼 뭐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도 했었다.
그러다 대학에 다니면서 허구헌날 "뻥!" 하고 터져대는 최루탄 가스와 시위대를 보면서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었다. 그리고 그 땐 조금만 있으면, 조금만 지나면 우리도 뭔가 힘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10년도 더 지났건만 여전히 우리에겐 뾰족한 힘이 없다.
여전히 우리 주위엔 미국이란 거대한 벽이 사방을 둘러 싸고 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이야 나름 우리도 할 말을 하고 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이들은 책 속의 재민이처럼, 윤희 언니처럼, 해자 아빠처럼 살고 있다.
김중미의 《거대한 뿌리》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살았던, 아니 잊으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곪아터진 상처와 원망이 있다. 편견과 비겁함으로 돌돌 말린 채 좀처럼 속 내를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나약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다.
... 세상으로 한발 한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내가 맞딱드린 것은 위선과 비겁함이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위만 보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내 발 밑에 스러진 숱한 그림자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늘 꿈에 시달려야 했다..." - p89
... 동두천을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하는지는 삶의 문제이다. 이 동두천에서 1960~70년대를 살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좋은 대학을 나와 성공한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동두천은 한밑천 잡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에게동두천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는 그저 양지를 위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그늘 밖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동두천은 또 다른 곳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다...
동두천은 말이야. 사람들을 떠나 보내지 않는 곳이야. 여기 살던 사람들에게 동두천은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거 같아. 나는 여길 떠날 기회가 있었고, 얼마든지 여길 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동두천은 현실이거든.. 이 땅 어디를 가도 지워버릴 수 없는... " - p188
"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세상이 음지와 양지로 나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때는 보산리기지촌과 생연리가 바로 그 음지와 양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두천을 떠나 좀더 자란 뒤에는 동두천이 음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자란 뒤에는 이 세상의 양지는 모두 음지를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음지와 양지는 서로 갈라 놓을 수 없는 한 몸이었다. 그랬다. 동두천은, 그 그림자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 p192
가끔 가족 나들이를 가는 길에 몇 번 이 동두천을 지나간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작은 동네는 "동두천"이란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묘한 연민을 주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분노를 가져다 준다. 내 나라이면서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는 동네, 그래서 감히 그 곳에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는 곳,내 나라 땅인데도 나보다도 더 우대 받고 보호받는 사람들이 많은 곳..
그래서 더욱 우리는 책 속으로 빠져 들어 함께 울고 분해하는 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미국으로 건너간 윤희 언니도, 제대로 된 일 하나 배우지 못하고 한 평생 손가락질 받아 온 튀기 재민이도 그리고 이제 곧 태어날 정아와 자히드의 아이도...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스산해 지는 이 가을, 숨기고 싶은 그들의 이야기로 가슴 뭉클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리라....
" ... 해가 저물고 하루가 저물 때마다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조각조각 낸 다음 실이나 노끈으로 다시 길게 이어 붙이고 싶다... "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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