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스쿨

#연필 소회

글쓴이 오누이맘

등록일 2005-12-06 13:03

조회수 2,595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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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날은-이해인
 
마른 향내 나는
갈색 연필을 깍아
글을 쓰겠습니다.
 
사각사각 소리나는
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
몇번이고 지우며
다시 쓰는 나의 하루
 
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깍이어도
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
어둠 속에도 빛나는 말로
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
 
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
당신을 위하여
소멸하겠습니다.
 
 
아마 이 시를 읽고부터 연필에 대한 무지막지한 환상이 생겼지 싶다.
연필은 소재인데 연필이 주제인양
내 삶에 자리했으니
만약 내가 대입 논술을 치루었다면
제시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논제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엉뚱한 글을 쓰기 십상이다.
 
여하튼 나는 연필이 좋다.
샤프를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니지만
연필이 좋았고 지금도 내 필통 속에는 연필이 늘 들어있다.
사실 샤프의 가느다랗게 사라락 써지는 그 필기감이
너무 사랑스러울 때도 있기는 하다.
연필은, 특히 심을 잘 갈지 않는 내 연필은 늘 뭉뚝하고 거칠어
쓰기에는 그다지 적당하지 않은 불친절한 필기구이다.
그래도 그 불친절한 연필이 나는 좋다.
 
은창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여느 엄마들처럼 설레이고 두려운 마음에
내가 은창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연필을 깍아주자 생각했다.
그것은 나로서는 아주 멋지고 낭만적인 작은 모성애였다.
집에는 결혼전부터 모아놓은 연필이 수북했다.
 
나는 열심히 즐겁게 연필을 깍아주었지만
은창이까지 좋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좋지 않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연필을 깍아주고 싶다는 바람이
연필을 깍아주어야만 한다는 의무와 권리로 여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 교실에 있는 연필깍이로 연필을 깍아온 녀석이
그렇게 섭섭했나보다....
 
1학기가 지나고 처음의 마음이 조금씩 흐려지고
문방구를 갈 때마다 매끈하게 잘 빠진 성능 좋을 연필깍이를 대할 때마다
약간씩 마음의 동요가 일기도 했지만
그것을 지그시 눌러 잠재우곤 했다.
 
그런데....
은창이가 토요일 연필깍이를 선물로 받아왔다.
우수독서상의 부상이었다.
학교에서 처음 받는 상이건만
나는 손에 들린 연필깍이에 눈이 더 머물렀다.
얼마전 새 연필 다섯 자루를 깍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손을 매만졌다....
 
어느새 12월이다.
어떻게 하나...
잘 할까...
그런데 이 겨울이 지나면 녀석은 2학년 형님이 된다
미리 받아온 국어 읽기책에 등장하는 동시는
이제 형님이 되는 아이들의 뿌듯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은창이는 2학년이 되면 반장이 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유인즉 삼촌이 반장이 되면
크래이드아케이드 게임을 깔아준다고 말했단다.
반장이 뭘 하는지
반장 엄마, 특히 저학년 반장 엄마의 부지런함을
이 게으른 엄마가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다른 친구들 다 하는 게임을 못하는 것이 속상하기만 한 은창이다.
 
할 수 없다.
반장이 안되는 조건으로 게임을 약속하는 수 밖에...^^;
 
그 옛날 처음 이해인님의 시를 접했을 때
나는 혈기왕성한 대학생이었다.
정직하고 정갈한 삶보다는
불타는 삶에 대한 희구가 더 어울릴 나이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 시가 너무 아름답고 견고하여
아직도 큰 울림으로 머물고 있다.
 
그런 삶을 흉내낸다고 연필을 열심히 깍아온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흉내에서 벗어나야하는 때인가...
연필깍이를 대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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